얼마 전 기사를 통해 안타까운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범죄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옥살이를 했는데 15년이 지난 뒤 재수사를 통해 무죄가 선고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던 일이었는데 오해를 사서 오랜 시간 고통 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보다 더 억울하고 답답한 오해를 받고 있는 분이 등장합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유대인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 그리고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사람들은 놀라운 깨달음과 은혜 안에서 살았지만 반대로 예수님을 믿지 못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하고 거부하며 살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격렬하게 거부당한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아마 분노하고 답답해하며 똑같이 보복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거부하는 자들을 포기하지 않고 인내로서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정체를 밝히라는 적대적인 군중들을 향해 친절하게 자신이 누구이신가를 차분하게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을 듣고 믿으며 알고 따르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합니다.(27~28절)
예수님은 영생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멸망하지 않도록 인도하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28절)
그래서 어떤 무엇도 믿는 자들을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손으로부터 빼앗을 자가 없다고 설명하십니다.(29절)
즉, 예수님은 이 땅에 찾아오신 목자로서 그의 양들인 사람들을 구원하고 보호하며 인도하는 주인이심을 말씀해주십니다.(27절)
예수님의 인내와 설득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거부하는 자들에게 찾아가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시고 설득하십니다. 인내로서 기다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세상을 되찾아 그들 또한 빼앗기지 않을 자녀로 만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사망 가운데 버려진 양들을 건지시고 인도하고자 하시는 참목자이십니다.
거부하는 이들까지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기 원합니다.
예수님은 인내로서 세상을 사랑하셨는데 혹여나 우리가 먼저 거부하거나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봅시다.
요즘 무척 교회들이 억울하게 비난받고 오해받고 있습니다. 교회에 출입하는데 눈치가 보입니다. 또 명절이 되면 믿음 때문에 가족들과 충돌이 생깁니다. 그러다보니 분노도 생기고, 한편으로는 도망쳐 외면하고 싶은 마음도 생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래 참으심으로 세상을 설득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인내는 교회의 덕목이어야 하고 친절과 설득은 유일한 선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으셨기에 우리도 참아야 하고 예수님이 설명하셨기에 우리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날에는 결국 구원받는 양과 떠나간 염소가 구별되겠지만 그 때가 이를 때까지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복음사역을 멈추시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와서 보라(come and see)'고 말한 것처럼 믿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에 담아 그 사랑을 살아내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