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나눔]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만이 모든 역사의 주관자가 되실 수 있습니다.
모든 역병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할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심판으로 역병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자연재해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심판으로 자연재해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의 한 조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과북의 분열로 이스라엘 민족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뉘었지요.
그러나 두 나라는 같은 민족, 같은 시간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달라도 너무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겁게 여기며 그 말씀을 언약의 말씀으로 여길줄 알았던 남유다는 여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와 하나님의 공금하심을 백성들이 경험하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과거의 기록으로만 여기며 인본주의적인 생각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을 세워가던 북이스라엘은 풍요를 가져다줄 수 있는 비옥한 땅이 있었음에도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위정자들이 반목과 반역을 일삼고 하나님의 진노를 앞당겨받게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북이스라엘 안에서도 믿음의 역사는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며 시대와 환경으로 인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안에서 언제든 모든 것을 초월하여 임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본문의 앞부분으로 16장 29-34절을 보게되면 아합이 왕이 되면서 그가 행한 악한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방나라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며 우상을 지극히 섬기도록 허용하고, 죄를 행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던 한 사람 아합왕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에 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만 더이상 주권자로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만 가볍게 여기고 죄를 행하기를 쉽게 여기던 아합왕으로 인해 그를 따르는 백성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무시하며 여리고를 다시 건축했다가 맏아들을 잃는 비극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17장 1-7절을 보게되면 엘리야를 통해서 이스라엘에 가뭄이 선포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겁게 여길 줄 알고 말씀을 지극히 큰 약속으로 믿었던 엘리야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가뭄이라는 징계를 내리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인생을 드린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며 그릿시냇가로 옮겨 그곳에서 기가막힌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경험하게됩니다.
가뭄으로 모든 것이 말라가서 사람과 가축과 농작물들이 목말라 죽어갈 때 마르지 않고 흐르는 시냇물을 원없이 마시고 하루 한끼도 먹기 힘들어진 세상 속에서 하루 두끼를 그것도 고기로 배를 채우는 기적을 일상으로 누리게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삶을 온전히 맡기는 하나님의 자녀를 책임지시되 확실하게 책임져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축복이 나만의 간증이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의 간증이 되도록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쓰시길 원하십니다.
오늘 묵상한 본문의 이야기는 엘리야에게 있었던 하나님의 공급하심의 축복이 사르밧과부의 집으로 흘러들어가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확인 할 수 있는 엘리야와 사르밧과부의 공통점을 묵상해볼때가장 선명하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대와 환경의 악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품을 경험하게 만드는 비결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삶의 자리는 자기 맘대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라는 말씀이 있은 뒤에 삶의 자리가 옮겨지는 과정을 계속 발견하게 됩니다.(17:2, 17:5, 17:8)
말씀이 가라하면 가고 멈추라하면 멈출줄 알았던 하나님의 말씀을 인생을 걸어도 될만한 크고 무거운 말씀으로 여길 줄 알았기에 그 인생을 주님이 먹이셨습니다.
사르밧과부에게 보내실 때에도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말씀하시며 까마귀를 통해서 먹이셨듯 한 과부에게 음식을 주게하셨다고 말씀하셨기에 엘리야는 간 것입니다.
자식과 함께 먹고 죽으려던 딱 한덩어리 만들 분량의 곡식가루와 기름밖에 없었던 과부에게 엘리야는 1인분 분량을 3인분으로 나누어 만들되 자기거 먼저 만들고 후에 모자가 만들어 먹으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과부에게 놀라운 축복의 약속을 선포합니다.
놀라운 것은 이 과부가 엘리야의 말을 엘리야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르밧과부는 엘리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약속하시는 축복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고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없어다면 이 과부는 "어디서 0수작이야~"라고 말하며 엘리야를 ?i아냈을것을 것이고 자기 말대로 그 아들과 함께 채우지 못하는 적은 양의 떡을 아들과 먹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부 안에 있었던 믿음이 엘리야를 사람으로만 보지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게만들어 엘리야의 말을 사람의 말이 아니니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게만들어 주었기에 그 아들과 함께 가뭄으로 흉년의 때에 가장 풍년의 삶을 누리는 축복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의 믿음을 위협하는 환경이 날마다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와 환경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사람은 엘리야처럼, 사르밧 과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무겁게 여기고 신뢰하며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람이 먼저 보이고 상황과 환경이 눈에 보이면 순종이 어렵게됩니다. 헌신이 어렵게됩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아닌 엘리야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았기에 사르밧과부는 순종이 되었고,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기름부음 받은 하나님의 종들(교역자, 장로)이 사람으로만 보이면 순종이 어렵고 헌신이 어렵게되지요.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기름부어 세우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하나님을 더 크게 보게된다면 순종과 헌신은 어렵지 않게됩니다.
선교사도 마찬가지인것 같습니다. 선교사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선교사의 삶과 사역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에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선교를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봐야만 섬김과 헌신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선교사 파송식은 선교를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선교를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큰 음성으로 여기며 사람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는 목록으로 삼고 하나되게하시는 성령을 따라 준비할 수 있게되도록 믿음으로 부르짖는 기도가 더욱 필요합니다.
엘리야와 사르밧과부를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믿음을 점검하게 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게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고 받아들이고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을 기꺼이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을 선포할 믿음의 확신이 있는지
주님이 우리에게 물으시는 질문 앞에 자신을 세워보고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령께서 우리를 새롭게 빚으셔서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안과 필요를 공급받는 기적을 경험하는 한 날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